우강_김진호
Ugang_KIM Jinho
발행일 : 2024.02.28
발행인 : 차승연
기획/편집 : 천수림
인터뷰 : 송지유
번역/감수 : 엠버 킴
인쇄/제본 : 현대원색문화사
발행처 : 블루핀커뮤니케이션
[김진호]
'풍경의 변화는 인간의 욕망에 비례한다'는 시선으로 도시와 자연의 경계에 걸친 불안정한 공간, 인간의 과도한 개입과 기후위기에 따른 지형 변화를 주제로 인문사회적 탐구와 사진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우강 해석
조현정 | (주)지문도시건축 소장/대표
2023.07.19
우강 만남
필자는 항공사진을 통해 우강을 처음 만났다. 건축가는 대상지의 위치나 입지 등을 확인하는 일이 잦다 보니 지도를 보고 땅을 읽는 일이 제법 익숙한 편이다. 지도로도 대상지나 지역의 많은 부분을 파악할 수 있어서 항공사진 및 로드 뷰(road view)로 기본적인 정보 확인을 꼭 거치게 된다. 그런데 우강의 첫모습은 어딘지 낯설었다. 무엇보다 들판 곳곳에 듬성듬성 떨어진 마을의 모습이 그랬다.
산이 많은 한국에는 오래전부터 배산임수(背山臨水, 산을 등지고 물을 바라다보는 곳에 자리를 잡는 것)라는 주거지 등을 앉히는 기준이 있다. 집들은 함께 모여 앉아 주거지를 명확히 하고, 경작지는 주거지에서 멀찌기 바라볼 수 있도록 구성되는 형태가 일반적이다. 딱히 산이 없는 평지라 하더라도 얕은 언덕이나 작은 숲, 큰 나무 등에 기대어 작은 범위라도 모여 있기 마련인데, 이 곳 우강은, 집들이 들판 한가운데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이 낯선 것이다. 가끔씩 산촌에 홀로 덩그러니 동떨어진 집들이 있게 마련이지만, 우강은 그것과는 달리 집들이 작정하고 거리를 벌리고 앉은 모양이다. 여간 이상하지 않다. 더구나 격자형으로 반듯하게 정리된 논 사이사이, 구불구불한 마을 길이 찔끔찔끔 남아, 쭉쭉 뻗어 있는 직선을 흩트리는 것도 기이한 기분이 든다. 삽교천과 아산만이라는 큰 물길 주변이 있는 동네라 간척이 있었으리라 짐작을 해보지만, 그렇다 해도 집들의 위치가 어딘지 예사롭지 않다. 사연이 궁금했다.
그리고 작가의 사진은 광활한 황무지에 듬성듬성 섬처럼 덩그러니 앉은 집들의 풍경은 익숙한 듯 생경한 기분이 들게 한다. 이 곳은 집들은 한국 같은데, 집 주변이 낯설다. 한편 한국에 있는 풍경이 맞는지 의아할 정도다.
“여기는 대체 어디인가?”
“어찌하다가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가?”
우강을 추적해본다.
우강 추적
가장 오래된 정밀지도인 1910~1920년대 제작된 일제강점기 지도에서 확인한 우강은 면적기준으로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삽교천(1)이 남원천(2)과 만나는 부장리(3)와 운정리(4)의 간척지가 늘어 논으로 바뀌었고, 삽교천과 만나는 천변의 부리포(5)를 포함한 포구들이 논으로 흡수되었다. 지도상에서 가장 눈에 띄는 큰 변화는 경지정리로 반듯해진 논의 경계와 물길이다. 현재는 반듯한 관개수로 역할 밖에 없지만 100년 전까지만 해도 우강 내 몇몇 물길들은 배가 다닐 수 있는 도로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한다. 남원포(6), 공포(7), 상포(8), 중포(9), 하포(10), 대포(11) 등과 같이 포浦로 끝나는 이름에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합덕리에는 고려시대 이전에 만들어진 관개시설로 전해지는 ‘합덕지合德池’ (12)라는 큰 저수지가 있었는데, 황해도 연안 남대지, 김제 벽골제와 함께 조선 3대 저수지 중의 하나였다고 전해진다. 합덕지는 1960년대 예당저수지가 생기면서 논으로 바뀌었다가 1989년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고, 2017년 세계 관개시설물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현재는 합덕제 수변공원으로 조성되었다. (당진시, www.dangjin.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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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1927 | 2022 |
남원포는 우강면의 경계인 남원천에 위치하며 기존 물길의 곡선은 다소 직선화 되었지만, 삽교천과 만나는 수량이 가장 많고 큰 물길을 유지하고 있다. 부리포(사발포 또는 사벌포로도 불린다) (5)도 삽교천과 물길로 연결되어 있는데, 15~16세기경 연안에서 물고기를 잡아다 파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지토선(地土船, 시골의 토민이 소유한 작은 배)이라고 하는 작은 배를 만들어 새우, 강다리, 황석어, 갈치, 민어, 방게, 복어, 장어 등을 잡았는데, 규모가 커지면서 지방의 어항으로 행상인들의 중요교통로 역할을 해왔다고 한다. 1970년대 초반까지도 인천을 드나드는 선박이 운행되었는데, 1975년경부터는 수문통까지만 배가 들어오다가 삽교천 방조제로 물길이 막히자 지금의 농경지로 변모하게 되었다 한다. 1910~20년대 지도에서 당시 부리포의 물길은 상포, 중포, 하포와 연결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동다리(13) (지금의 상동리와 하평리 사이)에서는 창리(14)까지 물길이 연결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동다리를 경계로 한 남쪽의 하평리(15)는 당시에도 현재에도 예산군 신암면에 속한다. 20세기 이전의 정밀 지도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이는 당시 물길이 명확한 지역 구분이 되는 강폭이 넓거나 깊은 중요한 물길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는 논 모양을 따라 격자형 수로로 정리되어 물길의 위계를 살펴보기 어렵지만, 당시는 물길의 위치와 규모 등에 따라 마을의 접근성과 매개성과 같은 중요도가 달랐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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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20년대 지도 위의 2022년 지도 (붉은색이 고지도) |
반면, 이런 물길의 많은 변화와는 대조적으로, 1910~20년대 지도에서 보이는 마을의 집들은 현재 지도에 겹쳐보면 대개 현재에도 같은 위치에서 확인이 된다. 100년전쯤과 비교해서 물길이나 경작지의 모양은 많이 달라졌지만, 마을이나 집들의 위치는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름이 없다. 20세기 급박하게 진행된 근현대화 물결이 이곳은 피해간 모양이다. 격자형으로 반듯한 논 사이로 조금씩 나타나는 자유 선형의 마을길들은 100년 전에도 있던 길이다.
1910~20년대 지도에서는 일제가 쌀 수탈 경로로, 마차가 다니는 길로 만들었다던 독포선(16) (지금의 70번 도로)을 제외하고 큰 도로는 보이지 않는다. 당시까지만 해도 이 지역은 육로보다 수로가 중요했는데, 우강을 포함한 내포지방(택리지를 근거한 충남 서북부 가야산 인근의 서산, 태안, 당진, 아산, 홍성, 예산, 보령 등지의 지역을 일컬음) 은 20세기 초중반까지도 충청, 전라, 경상의 물산이 서울로 운송될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해역을 끼고 있어 서울의 근교로 인식될 정도로 중요한 거점이었다. 일제강점기 이후 철도 및 도로 등의 발달로 육로 중심의 대도시 발전이 이루어지면서 인천과 가깝고 곳곳에 포구가 산재한 삽교천 인근의 우강은 상대적으로 고립된 지역으로 변했다. 특히 1931년 장항선이 경남선(京南線)이라는 이름의 사설철도로 개통되지만, 국가발전이 경부선에 집중되면서 장항선의 개량이 늦춰져 도로망이 크게 개선되지 못하고, 서울을 왕래하기 위해서는 기선으로 직접 인천으로 출입하거나, 한진나루 등에서 아산만을 건너갔다고 한다. 1979년 삽교천방조제 도로가 완공되기 전까지도 불편한 도로 대신 선박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그로부터 약 50년이 지난 현재, 물이 더 이상 길이 되지 않는 삽교천변의 우강엔 쌀농사를 위한 너른 들판이 남았지만, 바다와 강을 통해 사람과 물자를 흐르게 하는 마을이 아니다. 2000년 즈음 서해안고속도로(1990년 착공하여 2000년 완공)가 생겨나, 현재는 수도권에서 2시간 이내 접근이 가능하게 되어, 평택의 국가산업단지의 연장인 듯 아산만을 사이에 두고 한진포구에도 국가산업단지가 들어와 있다. 수도권 인접으로 인구 유동성을 확보할 조건은 갖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로 인해 앞으로 지역 상황은 또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개척의 땅, 괴촌(塊村) 우강
우강면지(2003)에 따르면 우강의 간척은 수세기에 걸쳐 진행되었다. 16세기 이전부터 주민들이 직접 간척을 진행한 것으로 전해온다. 다음 표(우강면 일대의 간척방향과 취락 형성시기, 우강면지. 2003)에서 우강면 일대의 간척 진행 및 취락 형성시기를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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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이미지를 합쳐서 우강면의 마을이름(부장리, 원치리, 신촌리…)와 우강면 일대의 간척방향과 취락형성시기를 한번에 보고 인지할 수 있도록 하면 좋겠습니다. |
현재 우강으로 불리는 부장리, 신촌리, 공포리, 강문리, 소반리, 성원리, 대포리, 내경리 등은 16세기 이전에는 간척이 진행되기 전 갯벌(간석지)이었다.
원치리, 세류리, 송산리 정도가 16세기 이전에도 있던 마을이지만, 17세기 들어서면서 부장리, 공포리 정도가 간척되었고, 18세기에는 신촌리, 강문리, 소반리, 성원리, 대포리, 내경리가 새롭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20세기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현재의 삽교천 인근의 간척이 최근까지 이어져 온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당진에 본격적인 집성촌이 들어온 시기는 17세기경 조선후기라고 하는데, 조선후기의 농업 기술 발전과 간척지 증가로 집성촌 발달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우강면지 2008) 영농의 공동작업, 경제적 상호 부조, 집단 이주의 개척, 농업기술의 발전과 수확량의 증대, 새로운 농경지 확보 등으로 집성촌의 경제력에 크게 기여했다고 하는데, 개척은 당시에도 활발히 진행된 것을 볼 수 있다. 당진 집성촌은 대다수 입향조가 붕당정치의 정치적 격동기를 보내면서 서울을 떠나 당진에 들어왔고, 이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활용하여 집터와 묘지터를 잡아갔다고 한다. 명당(이보다 이후이긴 하지만, 18세기 중반의 택리지에 따르면 당진을 포함한 내포가 가장 살기 좋은 고장으로 소개되는 것으로 미루어, 당시에도 내포의 입지는 살기 좋은 곳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을 내세워 가족을 유입시키고, 양반이라는 신분과 안정적인 경제력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으며, 종숙 개념의 서당을 세워 학문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했다. 그렇게 당진에도 많은 집성촌이 형성되었고, 농촌의 근대화 전까지 큰 변동없이 유지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송악, 송산, 석문 등지에 만들어진 집성촌과는 달리, 우강은 각성마을로 집성촌이 거의 없으며, 박원, 홍원, 독원, 피원, 남원, 신원, 진원, 노원, 협원, 활원, 감찰원, 고래원, 정계원을 비롯하여 합덕읍에 하신원, 궁원, 원점원, 하궁원, 상궁원 등 간척당시의 세력자나 새로 정착한 사람의 성을 따 지명으로 된 마을이 많다. 이로부터 짐작컨데, 현재 우강지역은 대부분 간척 이전에 경작과 거주가 어려운 간석지(밀물 때는 물에 잠기고 썰물 때는 물 밖으로 드러나는 모래 점토질의 평탄한 땅)였던 것으로 보인다.
1907년 일제에 의해 국유미간지이용법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개간지에 대한 특별한 관리가 없고, 소유자가 정해지지 않은 미개간지에 대해서 개인에 의해 개간되면 사유화가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간척자의 성을 따 마을의 이름을 만든 것으로 보아, 간척에 성공하면 농경지의 사유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외지인들이 유입되어 생겨났을 것으로 짐작해본다. 농토나 거주지로 쓸모가 없던 갯땅(개펄)에서 염분을 빼내어 농토를 만들 수만 있다면 먹고 살 땅이 생기는 것이니, 그 과정이 고되기는 하겠지만 농토 부족으로 궁핍한 시기, 간척이 가능한 이 지역은 희망의 땅이었지 않을까? 더구나 이미 수세기에 걸쳐 진행된 간척으로 이 지역의 간척에 대한 노하우가 상당했을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이 지역에 정착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간척지를 넓혀온 것이 지금 소들강변(우강牛江)이 된 것으로 짐작해본다.
국유미간지이용법 재정 후, 기존에 자유롭게 개간하여 개간지를 자기 소유로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이제 그 개간에 농상공부대신의 허가를 받아야 했고 대여료를 선납해야 하였다. 이로써 개간은 실제로 크게 제한을 받게 되었다.
지금의 우강이 괴촌(塊村, 민가가 모여 불규칙한 덩어리 모양을 한 마을)이라고 불리는 듬성듬성 흩어진 섬 같은 마을들의 모습을 갖게 된 것은 아마도, 간척으로 땅을 새롭게 개척하여 경작지로 만들면서 유입되어 정착한 사람이, 미개간지의 빈 곳을 점하기 위해, 개척하여 만든 땅을 집터로 삼고 관리하고 가꾼 것으로 짐작해본다. 기존 마을의 정착민 사이에는 틈이 없어, 개척한 땅을 점지하고 영역을 차지한 것이 100년 전과 비슷한 지금의 풍경이 된 것으로 말이다. 자리를 벌리고 앉은 집들은 개척 주민들이 점지한 땅의 영역을 나누는 기준이 되었던 것이지 않을까 한다.
온몸으로 매만져 만들어진 땅
개척이라고 표현은 간단하지만, 실제로 땅을 일으켜 둑을 세우고 물을 채웠다가 말려서 소금을 빼내고, 담수를 채웠다가 묵혔다가 빼내기를 수십 번, 보리를 심어 염분을 빼내는 등 긴 시간 그야말로 온 몸으로 땅을 일으키고 씻어내기를 반복하면서 경작이 가능하도록 ‘땅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갯땅을 쌀 짓는 쓸모 있는 땅으로 만들기 위해서 온 몸으로 끊임없이 땅을 쓰다듬었던 개척자들에게 이런 땅이 어떤 의미일지 사뭇 짐작이 어렵다. 그들의 이 땅에 대한 애착은 어떨까? 어떤 형태를 갖춘 물체라면 물체를 직접 만든 것에서 오는 애착으로 짐작할 만하지만, 그 대상이 어떤 물체의 형상이 없는 ‘땅’이라면, ‘장소’라면, 그리고 그 ‘땅’이 먹고 살 수 있는 기반이 되는 것이라면, 사시사철 뿌린 만큼 거두도록, 땀을 쏟은 만큼 열매를 맺도록, 매해 어김없이 약속을 지키며 가족의 생명을 기르는 바탕이라면, 이는 어떤 것일지 수이 짐작이 되지 않는다. 고향이나 추억에 대한 감상적인 향수와는 또 다른 차원의 깊이일 것 같다. 그 삶에 스며든 주민들은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표현이 어려운 내재된 것일 수 있지만, 필자에게는 매일의 햇빛과 바람과 비와 호흡하며, 씨앗이라는 생명을 열매로 길러내는 대지에 대한 경이로운 마음이 일어남과 동시에, 한편 이런 자연의 경이로운 감각들과는 단절된 채 인위적인 도시환경에서 건물과 건물만 넘나드는 도시적 감각에 정복된 현대인의 삶을 생각하니 사뭇 짐작이 되지 않는 것도 이해가 된다.
농사를 지을 수도 집을 지을 수도 없던 땅을 손수 끈질기게 어루만져 쓸모 있는 땅으로 만들고 집을 짓고 농사를 짓는 심정은 필자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개척주민들이 수세기에 걸쳐 이어 온 땅과의 관계는 어떤 경외감으로 다가온다. 더구나 현대 문명이 초래한 환경 파괴와 자연과 인간 관계의 불균형으로 빚어진 기후변화에 대한 체감이 날로 커가는 지금과 같은 시점에서, 우강의 이야기는 다양한 환기를 불러일으킨다.
개척민의 주체적 삶과 풍경
우강은 육로 중심의 도시 발전과 산업화와 근대화의 급속한 물결에서 물러나 있었던 터라, 아직 옛모습을 간직한 풍경이 많이 남아있다. 근대시기 주택의 상징과도 같이 전국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평지붕의 벽돌집인 소위 ‘양옥’은 가끔 마을회관으로 쓰이는 건물을 제외하고 우강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1970년대 새마을사업은 시멘트를 사용한 환경개선사업이라고 하여 ‘양회(시멘트)사업’이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우강에도 마찬가지로 주택개량사업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우강면지 2008) 당시 보급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멘트로 벽을 바르거나 시멘트블록으로 벽을 쌓고, 슬레이트나 시멘트기와로 지붕의 재료가 달라지기는 했지만, 대부분 기존에 초가였던 전통적인 민가(한옥)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목구조의 칸을 ‘ㄴ’이나 ‘ㄷ’형태로 조합하고, 우진각이나 팔작 형태로 목조 지붕을 만든, 초가가 바탕인 집들이다. 집의 진입부를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는 대문칸을 유지한 집들도 자주 보인다. 듬성듬성 따로 떨어져 집집마다의 완결성을 갖는 것도 우강 집들의 특징이라면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집은 ‘ㄴ’자나 ‘ㄷ’, ‘ㄴ’ 두개를 모아 만든 열린 ‘ㅁ’형태도 자주 보이는 것으로 보아 독립된 집들이 너른 들판에 사방으로 열려있기는 하지만 집의 특성상 나름의 ‘내부성(또는 내면성, 거주공간의 사적영역으로의 특성)’을 갖도록 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또 한가지, 굴뚝들을 매우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각각의 집들이 거리를 벌려 앉은 탓으로 집 전체 모습이 잘 보이는데, 유독 붉은 벽돌로 제법 높게 만든 굴뚝이 눈에 가장 잘 들어온다. 이제는 사용하지 않겠지만, 대부분 깨끗하고 정갈하게 잘 보존되어 있다. 시멘트로 매끈하게 미장하고 페인트를 칠한 벽의 밋밋함과 대조되어 특히 부각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굴뚝이 집집마다 같은 붉은 벽돌에 비슷한 높이를 하고 있어, 우강의 특징으로 읽히기도 한다. 들판에서 구하기 힘든 나무를 대신해 볏짚을 땔감으로 쓰다 보니, 연기가 많이 나는 볏짚에 맞게 연기를 잘 뽑아 올리도록 굴뚝을 높이 지은 것이라는 주민의 이야기를 작가로부터 전해 들었다.
벽돌은 개항기 서양의 건축양식이 들어오고 일제강점기 근대건축이 본격적으로 지어지면서 한국에서 성행하기 시작했다. 1970~90년대에 본격적으로 민간에서 사용되었지만, 우강은 79년 삽교천 방조제 설치로 뱃길이 막히게 된 것이다. 70년대 중반까지는 인천과의 왕래가 잦았던 점을 감안할 때, 벽돌로 된 굴뚝은 아직 뱃길이 왕성하게 사람과 물자를 실어 나르던 시기, 대부분 비슷한 모양과 재료를 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거의 동일한 시기에 우강면 전체에 유행하여 집중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시기적으로 볼 때 새마을운동의 주택개량사업 당시 동시에 진행되었을 가능성도 있겠다. 주민을 만나서 물어보면 간단히 확인할 수 있겠지만, 먼저 짐작해본다.
우강의 현재 풍경은 뱃길이 막히고 불편한 육로 교통으로 상대적으로 고립되면서 급속한 변화의 시기를 변화 없이 정체된 상태로 지내 온 것 같아 자칫 낙후된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고도화된 산업과 자본이 이룬 현대 도시의 풍경을 모범이라고 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실제 우강의 풍경에서 마주하는 집들은 긴 시간 깨끗하게 잘 보존된 집들이 많다. 집이든 창고든 슬레이트 지붕이나 시멘트 블록이나 시멘트 미장과 같이 애시당초 견고하고 고급진 재료들로 지어진 건 아니었음에도 지금도 깨끗하고 정갈하게 정돈이 잘 되어있어 오래된 느낌은 들지만, 낙후된 느낌은 들지 않는다. (모든 마을은 아니겠지만, 필자가 확인한 바로는 대부분) 그리고 마을 곳곳 남은 땅에 가지런한 모양으로 텃밭으로 땅에 무늬를 만드는 풍경은 흡사 텃밭으로 조경을 하는 것 같은 인상이 들기도 한다.
한국의 전형적인(오손도손한 집성촌) 산촌의 모습은 아니지만 이전의 삶을 가늠해볼 수 있는 다양한 여지를 잘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옛스럽기도 하여 친근하고 편안한 느낌이 든다. 한편 우강은 개척과 주체적 삶을 보살피는 풍경으로 읽히기도 한다. 현대인들이 자본과 권력의 소용돌이에서 영유아기 교육부터 평생 직업까지 끊임없이 경쟁하고 계급을 매기는 것과 대조적으로, 우강의 개척자들은 스스로 땅을 만들고, 오랜 세월 살피고 매만지며 주체적으로 일군 삶의 새로운 가치를 풍경으로 만들어내고 지켜온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은 문화적 주체성을 대변하는 풍경으로도 보이는 것이다.
문득 필자는 한국이 일제강점기를 거치지 않고 근대화와 산업화를 주체적으로 맞이했다면 한국의 현대는 어떤 모습일까 생각해보게 된다. 일제를 통해 근대화를 받아들인 한국은 자국의 전통문화를 스스로 근현대화로 이끌지 못하고 일제강점기 문화말살에 무력하게 전통을 끊어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분야에서 문화적 뿌리를 잃고, 집도 삶도 사회가 정답이라고 제시하는 삶에 맞추어 현재까지도 수동적으로 삶을 살아오고 분위기가 있는 것 같다. 만약 일제강점기 없이 개항을 보다 주체적으로 맞이하고 근대화 과정을 능동적으로 수용했다면 지금 한국은 어떤 모습일까? 우강 같은 마을들이 현대도시의 모습과 더욱 다양하게 혼재되어 있지 않을까? 풍경은 우리의 삶을 닮아 있으므로 풍경이 우리의 삶을 재고하도록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우강 주민들의 주체적이고 성실한 개척자 정신이, 온 몸으로 둑을 일으켜 논으로 일군 땅에 대한 애정과 논둑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며 물을 가두고 흘리는 노고를 사시 사철 몸에 새긴 부지런한 보살핌의 습성이, 건물도 깨끗하고 정갈하게 유지하여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강 사진집의 흑백사진에는 확인할 수 없으나, 실제 우강의 집들에는 알록달록 색을 입힌 집들이 많다. 색깔을 사용하고자 하는 것이 어떤 이유인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드넓은 들판의 지루할 수 있는 풍경에 생동감을 부여하려는 것이 되었든, 집집마다 나름의 개성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든, 오래전 새마을운동으로 배운 ‘자조’ 정신의 발현이든, 어쨌든 집과 마을을 꾸미고 가꾼다는 측면에서 풍경을 생각하는 주민들의 태도가 결국 우강의 집들이 오랜 세월 잘 관리되어 온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우강의 개척문화가 만들어낸 주민들의 주체성이 우강을 시간이 지속하는 풍경으로 만든 것이라고 믿는다.
땅과 삶에 대한 애도 (우강 사진에 관한 여담)
작가는 첫 만남에서 이런 우강의 과거와 미래를 단숨에 알아차린 것일까? 작가는 우강의 땅에서 향수를 느꼈다고 했다. 실제로 작가사진의 시선은 대부분 땅을 향해 있다. 거칠기도 다정하기도 하고, 차갑기도 따뜻하기도, 황폐하기도 가득하기도, 멀기도 가깝기도 한 다양한 땅의 모습들이 있다. 도시에서의 삶에 익숙해진 작가에게 우강의 풍경과 땅은 어떤 시점에서 작가 자신의 고향 풍경과 땅에 대한 향수를 극적으로 증폭시켰을 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사진 속 우강은, 들판이 배경인 지역 특성상 지평선을 축으로 프레임 내부는 명확하게 땅과 하늘로 풍경이 나뉜다. 다른 지형 지물 같은 배경이 없이 단순히 들판만이 배경이 되다 보니 하늘과 대비된 땅 위의 모습들이 여과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데, 건물이나 구조물을 비롯한, 굴뚝, 전봇대, 전선은 물론이고 땅과 도로, 하물며 비닐의 질감까지 명확하게 와닿는다. 대상의 평범성과 풍경 자체의 어수선함이 여과없이 보인다. 그런데, 특별할 것 없이 평범한 것 같고 어수선한 이 풍경들은, 보는 이의 눈을 수이 놓아주지 않는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만들고, 어느새 사진을 따라 지역과 풍경과 관찰자의 시선을 더듬고 있다. 작가의 관점에서 그의 시선에 맞춰 시선의 보폭을 옮기게 된다. 강력한 흡입력으로 시선을 낚아채는 사진과는 달리, 보는 이를 자기도 모르게 우강을 관찰하는 데 동조하도록 이끈다. 사진에 스며있는 어떤 아련한 그리움의 정서가 전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역 아카이브에 가까운 사진들이다. 작가는 작가 자신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풍경을 탐색하면서 풍경을 수집한 듯하다. 수집한 것들의 의미를 따라가보니, 지역의 이야기들을 만나게 되었고, 우강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작가는 개척자들의 애착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우강의 거친 풍경들과 애착이 생긴 것 같다. ‘미련’일지도 모르겠으나, 우강의 이야기를 따라 가 보니 사뭇 더 필자도 우강이 더 궁금하다.
“저 길은…”
“저 강은…”
“저 집은…”
“저 나무는…”
“저 굴뚝은…”
“저 논은…”
“저 밭은...”
“저 창고는…”
“저 탑은…”
“저 전신주는…”
“그리고, 저 땅은…”
산촌의 풍경에 익숙하든 익숙하지 않든, 우강을 모르고 우강을 스치는 사람들에게는, 듬성듬성 별 의미 없어 보이는 밋밋한 풍경일 수 있지만, 작가의 프레임 안에 우강의 밋밋한 풍경은 구구절절 사연을 갖는다. 그런 사연을 갖다 붙이는 작가의 시선에 애틋함이 있다.
한때 물자들과 사람들이 풍성했다던 포구들의 흔적들은, 남아있는 물길이 미세하게 암시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시절의 영화와 번잡함은 더 이상 전해지지 않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들판이 남았고, 그 사이에 가끔 집들이 떠 있을 뿐이다. 강물도 바다물도 이제는 더 길이 아니다. 작가는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차원으로 변화될 수 있는 우강의 현재를, 그나마 더 변하기 전에 현재의 모습대로 추억하고 간직하기 위해 사진이라는 행위를 통해 애도하고 있다.
총천연색으로 보여지는 생명력을 걸러내고 싶었던 것일까? 굳이 색을 뺀 흑백으로 풍경을 담은 이유는해와 바람과 비를 감지하며 땅과 호흡하며 땅을 일구는 삶의 감각을 잃어, 땅을 보고도 무감각할 수밖에 없는 현대인들에게, 고된 개척작업으로 일구어 놓은 땅의 황폐함과 어수선한 풍경으로 만들어진 땅이 가졌던 생명력을 역설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주체적으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생산하는 그런 삶을 우강에서 보았다. 일굴 수 있는 땅을 확보하기 위해 땅과 씨름하던 수세기 동안의 선인들의 삶을 애도하는 방법으로 작가는 사진으로 우강을 담았다.
[참고자료]
우강면지, 2003
내포문화권 개발의 역사-문화적 의의, 오석민, 2005
디지털당진문화대전 http://dangjin.grandculture.net/
당진시 데이터 포털 우리데이터 http://www.dangjin.go.kr/
당진시대 http://www.djtimes.co.kr/
충청남도문화원연합회 | 당진문화원 http://ebook.cnkccf.or.kr/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https://cihc.or.kr/
국토정보맵 http://map.ngii.go.kr/
한겨레 2018-01-22 (박정희는 왜 컬러 TV 방영을 두려워했을까)
https://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828789.html
우강_김진호
Ugang_KIM Jinho
발행일 : 2024.02.28
발행인 : 차승연
기획/편집 : 천수림
인터뷰 : 송지유
번역/감수 : 엠버 킴
인쇄/제본 : 현대원색문화사
발행처 : 블루핀커뮤니케이션
[김진호]
'풍경의 변화는 인간의 욕망에 비례한다'는 시선으로 도시와 자연의 경계에 걸친 불안정한 공간, 인간의 과도한 개입과 기후위기에 따른 지형 변화를 주제로 인문사회적 탐구와 사진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우강 해석
조현정 | (주)지문도시건축 소장/대표
2023.07.19
우강 만남
필자는 항공사진을 통해 우강을 처음 만났다. 건축가는 대상지의 위치나 입지 등을 확인하는 일이 잦다 보니 지도를 보고 땅을 읽는 일이 제법 익숙한 편이다. 지도로도 대상지나 지역의 많은 부분을 파악할 수 있어서 항공사진 및 로드 뷰(road view)로 기본적인 정보 확인을 꼭 거치게 된다. 그런데 우강의 첫모습은 어딘지 낯설었다. 무엇보다 들판 곳곳에 듬성듬성 떨어진 마을의 모습이 그랬다.
산이 많은 한국에는 오래전부터 배산임수(背山臨水, 산을 등지고 물을 바라다보는 곳에 자리를 잡는 것)라는 주거지 등을 앉히는 기준이 있다. 집들은 함께 모여 앉아 주거지를 명확히 하고, 경작지는 주거지에서 멀찌기 바라볼 수 있도록 구성되는 형태가 일반적이다. 딱히 산이 없는 평지라 하더라도 얕은 언덕이나 작은 숲, 큰 나무 등에 기대어 작은 범위라도 모여 있기 마련인데, 이 곳 우강은, 집들이 들판 한가운데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이 낯선 것이다. 가끔씩 산촌에 홀로 덩그러니 동떨어진 집들이 있게 마련이지만, 우강은 그것과는 달리 집들이 작정하고 거리를 벌리고 앉은 모양이다. 여간 이상하지 않다. 더구나 격자형으로 반듯하게 정리된 논 사이사이, 구불구불한 마을 길이 찔끔찔끔 남아, 쭉쭉 뻗어 있는 직선을 흩트리는 것도 기이한 기분이 든다. 삽교천과 아산만이라는 큰 물길 주변이 있는 동네라 간척이 있었으리라 짐작을 해보지만, 그렇다 해도 집들의 위치가 어딘지 예사롭지 않다. 사연이 궁금했다.
그리고 작가의 사진은 광활한 황무지에 듬성듬성 섬처럼 덩그러니 앉은 집들의 풍경은 익숙한 듯 생경한 기분이 들게 한다. 이 곳은 집들은 한국 같은데, 집 주변이 낯설다. 한편 한국에 있는 풍경이 맞는지 의아할 정도다.
“여기는 대체 어디인가?”
“어찌하다가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가?”
우강을 추적해본다.
우강 추적
가장 오래된 정밀지도인 1910~1920년대 제작된 일제강점기 지도에서 확인한 우강은 면적기준으로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삽교천(1)이 남원천(2)과 만나는 부장리(3)와 운정리(4)의 간척지가 늘어 논으로 바뀌었고, 삽교천과 만나는 천변의 부리포(5)를 포함한 포구들이 논으로 흡수되었다. 지도상에서 가장 눈에 띄는 큰 변화는 경지정리로 반듯해진 논의 경계와 물길이다. 현재는 반듯한 관개수로 역할 밖에 없지만 100년 전까지만 해도 우강 내 몇몇 물길들은 배가 다닐 수 있는 도로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한다. 남원포(6), 공포(7), 상포(8), 중포(9), 하포(10), 대포(11) 등과 같이 포浦로 끝나는 이름에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합덕리에는 고려시대 이전에 만들어진 관개시설로 전해지는 ‘합덕지合德池’ (12)라는 큰 저수지가 있었는데, 황해도 연안 남대지, 김제 벽골제와 함께 조선 3대 저수지 중의 하나였다고 전해진다. 합덕지는 1960년대 예당저수지가 생기면서 논으로 바뀌었다가 1989년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고, 2017년 세계 관개시설물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현재는 합덕제 수변공원으로 조성되었다. (당진시, www.dangjin.go.kr)
1919~1927
2022
남원포는 우강면의 경계인 남원천에 위치하며 기존 물길의 곡선은 다소 직선화 되었지만, 삽교천과 만나는 수량이 가장 많고 큰 물길을 유지하고 있다. 부리포(사발포 또는 사벌포로도 불린다) (5)도 삽교천과 물길로 연결되어 있는데, 15~16세기경 연안에서 물고기를 잡아다 파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지토선(地土船, 시골의 토민이 소유한 작은 배)이라고 하는 작은 배를 만들어 새우, 강다리, 황석어, 갈치, 민어, 방게, 복어, 장어 등을 잡았는데, 규모가 커지면서 지방의 어항으로 행상인들의 중요교통로 역할을 해왔다고 한다. 1970년대 초반까지도 인천을 드나드는 선박이 운행되었는데, 1975년경부터는 수문통까지만 배가 들어오다가 삽교천 방조제로 물길이 막히자 지금의 농경지로 변모하게 되었다 한다. 1910~20년대 지도에서 당시 부리포의 물길은 상포, 중포, 하포와 연결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동다리(13) (지금의 상동리와 하평리 사이)에서는 창리(14)까지 물길이 연결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동다리를 경계로 한 남쪽의 하평리(15)는 당시에도 현재에도 예산군 신암면에 속한다. 20세기 이전의 정밀 지도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이는 당시 물길이 명확한 지역 구분이 되는 강폭이 넓거나 깊은 중요한 물길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는 논 모양을 따라 격자형 수로로 정리되어 물길의 위계를 살펴보기 어렵지만, 당시는 물길의 위치와 규모 등에 따라 마을의 접근성과 매개성과 같은 중요도가 달랐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10~20년대 지도 위의 2022년 지도 (붉은색이 고지도)
반면, 이런 물길의 많은 변화와는 대조적으로, 1910~20년대 지도에서 보이는 마을의 집들은 현재 지도에 겹쳐보면 대개 현재에도 같은 위치에서 확인이 된다. 100년전쯤과 비교해서 물길이나 경작지의 모양은 많이 달라졌지만, 마을이나 집들의 위치는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름이 없다. 20세기 급박하게 진행된 근현대화 물결이 이곳은 피해간 모양이다. 격자형으로 반듯한 논 사이로 조금씩 나타나는 자유 선형의 마을길들은 100년 전에도 있던 길이다.
1910~20년대 지도에서는 일제가 쌀 수탈 경로로, 마차가 다니는 길로 만들었다던 독포선(16) (지금의 70번 도로)을 제외하고 큰 도로는 보이지 않는다. 당시까지만 해도 이 지역은 육로보다 수로가 중요했는데, 우강을 포함한 내포지방(택리지를 근거한 충남 서북부 가야산 인근의 서산, 태안, 당진, 아산, 홍성, 예산, 보령 등지의 지역을 일컬음) 은 20세기 초중반까지도 충청, 전라, 경상의 물산이 서울로 운송될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해역을 끼고 있어 서울의 근교로 인식될 정도로 중요한 거점이었다. 일제강점기 이후 철도 및 도로 등의 발달로 육로 중심의 대도시 발전이 이루어지면서 인천과 가깝고 곳곳에 포구가 산재한 삽교천 인근의 우강은 상대적으로 고립된 지역으로 변했다. 특히 1931년 장항선이 경남선(京南線)이라는 이름의 사설철도로 개통되지만, 국가발전이 경부선에 집중되면서 장항선의 개량이 늦춰져 도로망이 크게 개선되지 못하고, 서울을 왕래하기 위해서는 기선으로 직접 인천으로 출입하거나, 한진나루 등에서 아산만을 건너갔다고 한다. 1979년 삽교천방조제 도로가 완공되기 전까지도 불편한 도로 대신 선박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그로부터 약 50년이 지난 현재, 물이 더 이상 길이 되지 않는 삽교천변의 우강엔 쌀농사를 위한 너른 들판이 남았지만, 바다와 강을 통해 사람과 물자를 흐르게 하는 마을이 아니다. 2000년 즈음 서해안고속도로(1990년 착공하여 2000년 완공)가 생겨나, 현재는 수도권에서 2시간 이내 접근이 가능하게 되어, 평택의 국가산업단지의 연장인 듯 아산만을 사이에 두고 한진포구에도 국가산업단지가 들어와 있다. 수도권 인접으로 인구 유동성을 확보할 조건은 갖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로 인해 앞으로 지역 상황은 또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개척의 땅, 괴촌(塊村) 우강
우강면지(2003)에 따르면 우강의 간척은 수세기에 걸쳐 진행되었다. 16세기 이전부터 주민들이 직접 간척을 진행한 것으로 전해온다. 다음 표(우강면 일대의 간척방향과 취락 형성시기, 우강면지. 2003)에서 우강면 일대의 간척 진행 및 취락 형성시기를 살펴볼 수 있다.
두 이미지를 합쳐서 우강면의 마을이름(부장리, 원치리, 신촌리…)와 우강면 일대의 간척방향과 취락형성시기를 한번에 보고 인지할 수 있도록 하면 좋겠습니다.
현재 우강으로 불리는 부장리, 신촌리, 공포리, 강문리, 소반리, 성원리, 대포리, 내경리 등은 16세기 이전에는 간척이 진행되기 전 갯벌(간석지)이었다.
원치리, 세류리, 송산리 정도가 16세기 이전에도 있던 마을이지만, 17세기 들어서면서 부장리, 공포리 정도가 간척되었고, 18세기에는 신촌리, 강문리, 소반리, 성원리, 대포리, 내경리가 새롭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20세기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현재의 삽교천 인근의 간척이 최근까지 이어져 온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당진에 본격적인 집성촌이 들어온 시기는 17세기경 조선후기라고 하는데, 조선후기의 농업 기술 발전과 간척지 증가로 집성촌 발달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우강면지 2008) 영농의 공동작업, 경제적 상호 부조, 집단 이주의 개척, 농업기술의 발전과 수확량의 증대, 새로운 농경지 확보 등으로 집성촌의 경제력에 크게 기여했다고 하는데, 개척은 당시에도 활발히 진행된 것을 볼 수 있다. 당진 집성촌은 대다수 입향조가 붕당정치의 정치적 격동기를 보내면서 서울을 떠나 당진에 들어왔고, 이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활용하여 집터와 묘지터를 잡아갔다고 한다. 명당(이보다 이후이긴 하지만, 18세기 중반의 택리지에 따르면 당진을 포함한 내포가 가장 살기 좋은 고장으로 소개되는 것으로 미루어, 당시에도 내포의 입지는 살기 좋은 곳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을 내세워 가족을 유입시키고, 양반이라는 신분과 안정적인 경제력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으며, 종숙 개념의 서당을 세워 학문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했다. 그렇게 당진에도 많은 집성촌이 형성되었고, 농촌의 근대화 전까지 큰 변동없이 유지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송악, 송산, 석문 등지에 만들어진 집성촌과는 달리, 우강은 각성마을로 집성촌이 거의 없으며, 박원, 홍원, 독원, 피원, 남원, 신원, 진원, 노원, 협원, 활원, 감찰원, 고래원, 정계원을 비롯하여 합덕읍에 하신원, 궁원, 원점원, 하궁원, 상궁원 등 간척당시의 세력자나 새로 정착한 사람의 성을 따 지명으로 된 마을이 많다. 이로부터 짐작컨데, 현재 우강지역은 대부분 간척 이전에 경작과 거주가 어려운 간석지(밀물 때는 물에 잠기고 썰물 때는 물 밖으로 드러나는 모래 점토질의 평탄한 땅)였던 것으로 보인다.
1907년 일제에 의해 국유미간지이용법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개간지에 대한 특별한 관리가 없고, 소유자가 정해지지 않은 미개간지에 대해서 개인에 의해 개간되면 사유화가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간척자의 성을 따 마을의 이름을 만든 것으로 보아, 간척에 성공하면 농경지의 사유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외지인들이 유입되어 생겨났을 것으로 짐작해본다. 농토나 거주지로 쓸모가 없던 갯땅(개펄)에서 염분을 빼내어 농토를 만들 수만 있다면 먹고 살 땅이 생기는 것이니, 그 과정이 고되기는 하겠지만 농토 부족으로 궁핍한 시기, 간척이 가능한 이 지역은 희망의 땅이었지 않을까? 더구나 이미 수세기에 걸쳐 진행된 간척으로 이 지역의 간척에 대한 노하우가 상당했을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이 지역에 정착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간척지를 넓혀온 것이 지금 소들강변(우강牛江)이 된 것으로 짐작해본다.
국유미간지이용법 재정 후, 기존에 자유롭게 개간하여 개간지를 자기 소유로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이제 그 개간에 농상공부대신의 허가를 받아야 했고 대여료를 선납해야 하였다. 이로써 개간은 실제로 크게 제한을 받게 되었다.
지금의 우강이 괴촌(塊村, 민가가 모여 불규칙한 덩어리 모양을 한 마을)이라고 불리는 듬성듬성 흩어진 섬 같은 마을들의 모습을 갖게 된 것은 아마도, 간척으로 땅을 새롭게 개척하여 경작지로 만들면서 유입되어 정착한 사람이, 미개간지의 빈 곳을 점하기 위해, 개척하여 만든 땅을 집터로 삼고 관리하고 가꾼 것으로 짐작해본다. 기존 마을의 정착민 사이에는 틈이 없어, 개척한 땅을 점지하고 영역을 차지한 것이 100년 전과 비슷한 지금의 풍경이 된 것으로 말이다. 자리를 벌리고 앉은 집들은 개척 주민들이 점지한 땅의 영역을 나누는 기준이 되었던 것이지 않을까 한다.
온몸으로 매만져 만들어진 땅
개척이라고 표현은 간단하지만, 실제로 땅을 일으켜 둑을 세우고 물을 채웠다가 말려서 소금을 빼내고, 담수를 채웠다가 묵혔다가 빼내기를 수십 번, 보리를 심어 염분을 빼내는 등 긴 시간 그야말로 온 몸으로 땅을 일으키고 씻어내기를 반복하면서 경작이 가능하도록 ‘땅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갯땅을 쌀 짓는 쓸모 있는 땅으로 만들기 위해서 온 몸으로 끊임없이 땅을 쓰다듬었던 개척자들에게 이런 땅이 어떤 의미일지 사뭇 짐작이 어렵다. 그들의 이 땅에 대한 애착은 어떨까? 어떤 형태를 갖춘 물체라면 물체를 직접 만든 것에서 오는 애착으로 짐작할 만하지만, 그 대상이 어떤 물체의 형상이 없는 ‘땅’이라면, ‘장소’라면, 그리고 그 ‘땅’이 먹고 살 수 있는 기반이 되는 것이라면, 사시사철 뿌린 만큼 거두도록, 땀을 쏟은 만큼 열매를 맺도록, 매해 어김없이 약속을 지키며 가족의 생명을 기르는 바탕이라면, 이는 어떤 것일지 수이 짐작이 되지 않는다. 고향이나 추억에 대한 감상적인 향수와는 또 다른 차원의 깊이일 것 같다. 그 삶에 스며든 주민들은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표현이 어려운 내재된 것일 수 있지만, 필자에게는 매일의 햇빛과 바람과 비와 호흡하며, 씨앗이라는 생명을 열매로 길러내는 대지에 대한 경이로운 마음이 일어남과 동시에, 한편 이런 자연의 경이로운 감각들과는 단절된 채 인위적인 도시환경에서 건물과 건물만 넘나드는 도시적 감각에 정복된 현대인의 삶을 생각하니 사뭇 짐작이 되지 않는 것도 이해가 된다.
농사를 지을 수도 집을 지을 수도 없던 땅을 손수 끈질기게 어루만져 쓸모 있는 땅으로 만들고 집을 짓고 농사를 짓는 심정은 필자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개척주민들이 수세기에 걸쳐 이어 온 땅과의 관계는 어떤 경외감으로 다가온다. 더구나 현대 문명이 초래한 환경 파괴와 자연과 인간 관계의 불균형으로 빚어진 기후변화에 대한 체감이 날로 커가는 지금과 같은 시점에서, 우강의 이야기는 다양한 환기를 불러일으킨다.
개척민의 주체적 삶과 풍경
우강은 육로 중심의 도시 발전과 산업화와 근대화의 급속한 물결에서 물러나 있었던 터라, 아직 옛모습을 간직한 풍경이 많이 남아있다. 근대시기 주택의 상징과도 같이 전국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평지붕의 벽돌집인 소위 ‘양옥’은 가끔 마을회관으로 쓰이는 건물을 제외하고 우강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1970년대 새마을사업은 시멘트를 사용한 환경개선사업이라고 하여 ‘양회(시멘트)사업’이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우강에도 마찬가지로 주택개량사업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우강면지 2008) 당시 보급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멘트로 벽을 바르거나 시멘트블록으로 벽을 쌓고, 슬레이트나 시멘트기와로 지붕의 재료가 달라지기는 했지만, 대부분 기존에 초가였던 전통적인 민가(한옥)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목구조의 칸을 ‘ㄴ’이나 ‘ㄷ’형태로 조합하고, 우진각이나 팔작 형태로 목조 지붕을 만든, 초가가 바탕인 집들이다. 집의 진입부를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는 대문칸을 유지한 집들도 자주 보인다. 듬성듬성 따로 떨어져 집집마다의 완결성을 갖는 것도 우강 집들의 특징이라면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집은 ‘ㄴ’자나 ‘ㄷ’, ‘ㄴ’ 두개를 모아 만든 열린 ‘ㅁ’형태도 자주 보이는 것으로 보아 독립된 집들이 너른 들판에 사방으로 열려있기는 하지만 집의 특성상 나름의 ‘내부성(또는 내면성, 거주공간의 사적영역으로의 특성)’을 갖도록 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또 한가지, 굴뚝들을 매우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각각의 집들이 거리를 벌려 앉은 탓으로 집 전체 모습이 잘 보이는데, 유독 붉은 벽돌로 제법 높게 만든 굴뚝이 눈에 가장 잘 들어온다. 이제는 사용하지 않겠지만, 대부분 깨끗하고 정갈하게 잘 보존되어 있다. 시멘트로 매끈하게 미장하고 페인트를 칠한 벽의 밋밋함과 대조되어 특히 부각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굴뚝이 집집마다 같은 붉은 벽돌에 비슷한 높이를 하고 있어, 우강의 특징으로 읽히기도 한다. 들판에서 구하기 힘든 나무를 대신해 볏짚을 땔감으로 쓰다 보니, 연기가 많이 나는 볏짚에 맞게 연기를 잘 뽑아 올리도록 굴뚝을 높이 지은 것이라는 주민의 이야기를 작가로부터 전해 들었다.
벽돌은 개항기 서양의 건축양식이 들어오고 일제강점기 근대건축이 본격적으로 지어지면서 한국에서 성행하기 시작했다. 1970~90년대에 본격적으로 민간에서 사용되었지만, 우강은 79년 삽교천 방조제 설치로 뱃길이 막히게 된 것이다. 70년대 중반까지는 인천과의 왕래가 잦았던 점을 감안할 때, 벽돌로 된 굴뚝은 아직 뱃길이 왕성하게 사람과 물자를 실어 나르던 시기, 대부분 비슷한 모양과 재료를 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거의 동일한 시기에 우강면 전체에 유행하여 집중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시기적으로 볼 때 새마을운동의 주택개량사업 당시 동시에 진행되었을 가능성도 있겠다. 주민을 만나서 물어보면 간단히 확인할 수 있겠지만, 먼저 짐작해본다.
우강의 현재 풍경은 뱃길이 막히고 불편한 육로 교통으로 상대적으로 고립되면서 급속한 변화의 시기를 변화 없이 정체된 상태로 지내 온 것 같아 자칫 낙후된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고도화된 산업과 자본이 이룬 현대 도시의 풍경을 모범이라고 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실제 우강의 풍경에서 마주하는 집들은 긴 시간 깨끗하게 잘 보존된 집들이 많다. 집이든 창고든 슬레이트 지붕이나 시멘트 블록이나 시멘트 미장과 같이 애시당초 견고하고 고급진 재료들로 지어진 건 아니었음에도 지금도 깨끗하고 정갈하게 정돈이 잘 되어있어 오래된 느낌은 들지만, 낙후된 느낌은 들지 않는다. (모든 마을은 아니겠지만, 필자가 확인한 바로는 대부분) 그리고 마을 곳곳 남은 땅에 가지런한 모양으로 텃밭으로 땅에 무늬를 만드는 풍경은 흡사 텃밭으로 조경을 하는 것 같은 인상이 들기도 한다.
한국의 전형적인(오손도손한 집성촌) 산촌의 모습은 아니지만 이전의 삶을 가늠해볼 수 있는 다양한 여지를 잘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옛스럽기도 하여 친근하고 편안한 느낌이 든다. 한편 우강은 개척과 주체적 삶을 보살피는 풍경으로 읽히기도 한다. 현대인들이 자본과 권력의 소용돌이에서 영유아기 교육부터 평생 직업까지 끊임없이 경쟁하고 계급을 매기는 것과 대조적으로, 우강의 개척자들은 스스로 땅을 만들고, 오랜 세월 살피고 매만지며 주체적으로 일군 삶의 새로운 가치를 풍경으로 만들어내고 지켜온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은 문화적 주체성을 대변하는 풍경으로도 보이는 것이다.
문득 필자는 한국이 일제강점기를 거치지 않고 근대화와 산업화를 주체적으로 맞이했다면 한국의 현대는 어떤 모습일까 생각해보게 된다. 일제를 통해 근대화를 받아들인 한국은 자국의 전통문화를 스스로 근현대화로 이끌지 못하고 일제강점기 문화말살에 무력하게 전통을 끊어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분야에서 문화적 뿌리를 잃고, 집도 삶도 사회가 정답이라고 제시하는 삶에 맞추어 현재까지도 수동적으로 삶을 살아오고 분위기가 있는 것 같다. 만약 일제강점기 없이 개항을 보다 주체적으로 맞이하고 근대화 과정을 능동적으로 수용했다면 지금 한국은 어떤 모습일까? 우강 같은 마을들이 현대도시의 모습과 더욱 다양하게 혼재되어 있지 않을까? 풍경은 우리의 삶을 닮아 있으므로 풍경이 우리의 삶을 재고하도록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우강 주민들의 주체적이고 성실한 개척자 정신이, 온 몸으로 둑을 일으켜 논으로 일군 땅에 대한 애정과 논둑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며 물을 가두고 흘리는 노고를 사시 사철 몸에 새긴 부지런한 보살핌의 습성이, 건물도 깨끗하고 정갈하게 유지하여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강 사진집의 흑백사진에는 확인할 수 없으나, 실제 우강의 집들에는 알록달록 색을 입힌 집들이 많다. 색깔을 사용하고자 하는 것이 어떤 이유인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드넓은 들판의 지루할 수 있는 풍경에 생동감을 부여하려는 것이 되었든, 집집마다 나름의 개성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든, 오래전 새마을운동으로 배운 ‘자조’ 정신의 발현이든, 어쨌든 집과 마을을 꾸미고 가꾼다는 측면에서 풍경을 생각하는 주민들의 태도가 결국 우강의 집들이 오랜 세월 잘 관리되어 온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우강의 개척문화가 만들어낸 주민들의 주체성이 우강을 시간이 지속하는 풍경으로 만든 것이라고 믿는다.
땅과 삶에 대한 애도 (우강 사진에 관한 여담)
작가는 첫 만남에서 이런 우강의 과거와 미래를 단숨에 알아차린 것일까? 작가는 우강의 땅에서 향수를 느꼈다고 했다. 실제로 작가사진의 시선은 대부분 땅을 향해 있다. 거칠기도 다정하기도 하고, 차갑기도 따뜻하기도, 황폐하기도 가득하기도, 멀기도 가깝기도 한 다양한 땅의 모습들이 있다. 도시에서의 삶에 익숙해진 작가에게 우강의 풍경과 땅은 어떤 시점에서 작가 자신의 고향 풍경과 땅에 대한 향수를 극적으로 증폭시켰을 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사진 속 우강은, 들판이 배경인 지역 특성상 지평선을 축으로 프레임 내부는 명확하게 땅과 하늘로 풍경이 나뉜다. 다른 지형 지물 같은 배경이 없이 단순히 들판만이 배경이 되다 보니 하늘과 대비된 땅 위의 모습들이 여과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데, 건물이나 구조물을 비롯한, 굴뚝, 전봇대, 전선은 물론이고 땅과 도로, 하물며 비닐의 질감까지 명확하게 와닿는다. 대상의 평범성과 풍경 자체의 어수선함이 여과없이 보인다. 그런데, 특별할 것 없이 평범한 것 같고 어수선한 이 풍경들은, 보는 이의 눈을 수이 놓아주지 않는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만들고, 어느새 사진을 따라 지역과 풍경과 관찰자의 시선을 더듬고 있다. 작가의 관점에서 그의 시선에 맞춰 시선의 보폭을 옮기게 된다. 강력한 흡입력으로 시선을 낚아채는 사진과는 달리, 보는 이를 자기도 모르게 우강을 관찰하는 데 동조하도록 이끈다. 사진에 스며있는 어떤 아련한 그리움의 정서가 전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역 아카이브에 가까운 사진들이다. 작가는 작가 자신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풍경을 탐색하면서 풍경을 수집한 듯하다. 수집한 것들의 의미를 따라가보니, 지역의 이야기들을 만나게 되었고, 우강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작가는 개척자들의 애착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우강의 거친 풍경들과 애착이 생긴 것 같다. ‘미련’일지도 모르겠으나, 우강의 이야기를 따라 가 보니 사뭇 더 필자도 우강이 더 궁금하다.
“저 길은…”
“저 강은…”
“저 집은…”
“저 나무는…”
“저 굴뚝은…”
“저 논은…”
“저 밭은...”
“저 창고는…”
“저 탑은…”
“저 전신주는…”
“그리고, 저 땅은…”
산촌의 풍경에 익숙하든 익숙하지 않든, 우강을 모르고 우강을 스치는 사람들에게는, 듬성듬성 별 의미 없어 보이는 밋밋한 풍경일 수 있지만, 작가의 프레임 안에 우강의 밋밋한 풍경은 구구절절 사연을 갖는다. 그런 사연을 갖다 붙이는 작가의 시선에 애틋함이 있다.
한때 물자들과 사람들이 풍성했다던 포구들의 흔적들은, 남아있는 물길이 미세하게 암시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시절의 영화와 번잡함은 더 이상 전해지지 않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들판이 남았고, 그 사이에 가끔 집들이 떠 있을 뿐이다. 강물도 바다물도 이제는 더 길이 아니다. 작가는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차원으로 변화될 수 있는 우강의 현재를, 그나마 더 변하기 전에 현재의 모습대로 추억하고 간직하기 위해 사진이라는 행위를 통해 애도하고 있다.
총천연색으로 보여지는 생명력을 걸러내고 싶었던 것일까? 굳이 색을 뺀 흑백으로 풍경을 담은 이유는해와 바람과 비를 감지하며 땅과 호흡하며 땅을 일구는 삶의 감각을 잃어, 땅을 보고도 무감각할 수밖에 없는 현대인들에게, 고된 개척작업으로 일구어 놓은 땅의 황폐함과 어수선한 풍경으로 만들어진 땅이 가졌던 생명력을 역설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주체적으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생산하는 그런 삶을 우강에서 보았다. 일굴 수 있는 땅을 확보하기 위해 땅과 씨름하던 수세기 동안의 선인들의 삶을 애도하는 방법으로 작가는 사진으로 우강을 담았다.
[참고자료]
우강면지, 2003
내포문화권 개발의 역사-문화적 의의, 오석민, 2005
디지털당진문화대전 http://dangjin.grandculture.net/
당진시 데이터 포털 우리데이터 http://www.dangjin.go.kr/
당진시대 http://www.djtimes.co.kr/
충청남도문화원연합회 | 당진문화원 http://ebook.cnkccf.or.kr/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https://cihc.or.kr/
국토정보맵 http://map.ngii.go.kr/
한겨레 2018-01-22 (박정희는 왜 컬러 TV 방영을 두려워했을까)
https://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828789.html